종문(宗門)은 참선을 위주로 합니다. 참선이란 마음을 밝혀 성품을 보는 것입니다. 이것은 바로 자기의 본래면목을 참구하여 뚫는 것이니, 소위 '자성을 밝게 깨쳐, 본래성품을 환히 보는 것(明悟自心 澈見本性)'입니다. 부처님께서 꽃을 들어 보이심으로부터 달마 조사께서 중국에 오셔서 전래하신 이후에 지금에 이르기까지 이 공부에 착수하는 방법은 여러 차례 변천이 있었습니다. 당, 송 이전의 선사들은 일언반구(一言半句)에 바로 도를 깨달았으며, 스승과 제자간의 전수라는 것은 마음으로 마음을 인가하는 것(以心印心)에 불과하여 어떤 실법(實法)도 있지 않았습니다. 일상적으로 묻고 답하는 것도 그때그때 방편으로 속박을 풀어 주는 것으로서 병에 따라 약을 줄뿐이었습니다. 그러나 송대 이후 사람들의 근기가 하열(下劣)해져서 일러주어도 알아듣지 못하니, 예컨대 '일체를 놓아라'거나, '선도 악도 생각하지 말라'해도 도무지 놓지 못하며, 선을 생각하지 않으면 악을 생각하는 식이 되었습니다.
이러한 시대가 되자 조사 스님들이 부득이 독으로써 독을 공격하는 방법을 채택하여 학인들에게 '공안(公案)'을 '참구'하라고 하였습니다. 처음에는 '화두(話頭)'를 '보라'고 하는데, 심지어 하나의 죽은 화두(死話頭)를 붙들고 결판을 내되 긴급히 계속하여 한순간도 놓치지 않도록 합니다. 마치 늙은 쥐가 나무 궤짝을 뚫을 때와 같이 한 군데를 몰고 늘어지면 뚫어질 때까지 결단코 그만둘 수 없는 것입니다. 이는 한 생각(一念)으로써 만 생각(萬念)을 물리치는 것이니, 실로 부득이한 방법이라 하겠습니다. 마치 나쁜 독이 몸 안에 있어, 칼로 째서 치료하지 않으면 살기 어려운 것과 같습니다.
옛 사람들의 공안이 많으나, 후에 와서는 오로지 '화두를 보라'고만 가르쳤습니다. 예컨대 '이 송장을 끌고 다니는 것은 누구인가?'이거나 '부모에게서 태어나기 전에 어떤 것이 나의 본래 면목인가(父母未生前 如何是我本來面目)?' 하는 화두를 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근래에 와서 제방에서 많이 쓰는 화두는 '염불하는 것은 누구인가?'하는 것인데, 이 화두는 실은 어떤 식으로 표현해도 다 마찬가지이며 모두 너무나 평범하여 별로 특별할 것도 없습니다. 말하자면, 경을 읽는 것은 누구며, 주문을 외우는 것은 누구며, 부처님께 절을 하는 것은 누구며, 밥을 먹는 것은 누구며, 옷을 입는 것은 누구며, 길을 가는 것은 누구며, 잠자고 깨어나는 것은 누구냐 하는 것들인데, 모두 같은 내용의 화두입니다. '누구인가(誰)?'라는 물음의 답은 바로 마음입니다. 말은 마음에서 일어나므로 마음은 말의 머리(話之頭)요, 생각도 마음에서 일어나므로 마음은 생각의 머리(念之頭)입니다. 만법이 모두 마음으로부터 생기므로 마음은 만법의 머리(萬法之頭)인 것입니다. 실로 화두는 바로 생각의 머리(念頭-생각 이전의 자리)이며, 생각 이전의 머리는 바로 마음입니다. 요컨대 '한 생각 일어나기 전(一念未生之前)'이 바로 화두인 것입니다.
2) 화두를 보는 법
따라서 우리가 도를 알려면 화두(한 생각 일어나기 전의 자리)를 보아야 하며, 이것이 곧 마음을 관찰하는 것(觀心)입니다. 부모에게서 태어나기 이전의 본래면목은 바로 마음입니다. 그러므로 부모에게서 태어나기 이전의 본래면목을 본다(看)는 것은 곧 마음을 관하는 것입니다. 성품은 곧 마음이며, '듣는 자기의 성품을 돌이켜 듣는다'고 하는 것은 관(觀)하는 자기 마음을 돌이켜 관하는 것입니다. '청정한 깨달음의 상(淸淨覺相)을 원만히 비추어 본다'고 할 때의 '청정한 깨달음의 상'이 바로 마음이며, '비추어 본다(照)' 함이 곧 관(觀)입니다. 마음이 곧 부처이며(心卽是佛), 부처를 염하는 것(염불)이 곧 부처를 관하는 것(觀佛)이고, 부처를 관하는 것이 마음을 관하는 것(觀心)입니다. 그래서 '화두를 보라'고 하는 것입니다. 어떤 이는 '염불하는 것은 누구인가(念佛是誰)?'하는 화두를 보라고 하는데 이것이 바로 부처를 염하는 자기 마음을 관한 것(觀心)이며, 곧 자기 마음의 청정한 깨달음의 체(自心淸淨覺體)를 관조하는 것입니다. 또한 가지 성품의 부처(自性佛)를 관조하는 것입니다. 마음이 곧 성품이고, 깨달음이며, 부처입니다. 이것은 형상이나 고정된 처소가 없으므로 끝내 붙잡을 수 없습니다. 청정하게 본래 있는 그대로 법계에 두루하며, 나오지도 들어가지도 않고, 가고 옴도 없으니, 이것이 곧 본래 그대로 이루어져 있는 청정법신불인 것입니다.
수행인이 육근(六根)을 모두 거두어 들여, 한 생각이 처음 일어나는 곳을 살피면서 이 하나의 화두를 비추어 보면, 생각을 떠난 청정한 자기의 마음에 도달하게 됩니다. 다시 면밀하고 담담하게 고요히 비추어 보면, 곧바로 오온(五蘊)이 모두 공(空)하고, 몸과 마음이 함께 고요하여 마침내 아무 일도 없게 됩니다. 이때부터는 주야육시(晝夜六時-24시간)로 행주좌와(行住坐臥)에 여여부동(如如不動)하여, 날이 갈수록 공부를 깊이 해 가면 마침내 견성성불(見性成佛)하여 고액을 다 건너가게 될 것입니다(苦厄度盡).
옛날 고봉(高峯) 조사께서 말씀하시기를, "공부하는 사람은 화두 살피기를, 마치 기왓장을 만 길이나 되는 깊은 못에 던졌을 때 곧장 밑바닥으로 내려가는 것과 같이 하라. 이렇게 하여 만약 7일이 되도록 깨닫지 못하면 내 머리를 자르라"고 했습니다. 함께 참구(同參)하는 이들이여, 이것은 몸소 겪어 본 분이 하신 말씀으로 진실한 말씀이며, 사람들을 속이는 허망한 말이 아닙니다. 그러나 어째서 현대인들은 화두를 드는 사람은 많아도, 도를 깨치는 사람은 적습니까? 이것은 요즘 사람의 근기가 옛 사람에 미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공부하는 사람이 참선을 하면서 화두의 이로(理路 - 화두를 참구해 들어가는 길)를 분명하게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은 동서남북으로 분주하게 오가며 스승을 찾고 법을 묻기만 하다가, 늘그막에 이르면 한 개의 화두도 분명하게 이해하지 못합니다. 어떤 것이 화두인지, 어떻게 해야 화두를 든다고 할 수 있는지 알지 못하고, 한 한 평생 말(言句)과 이름과 형상(名相)에 집착하여 말꼬리(話尾)를 가지고 마음을 쓰면서, '부처를 참구하는 이는 누구인가?', '화두를 비추어 보라' 하면서 계속 하다 보니 화두와는 정반대로 어긋납니다. 이렇게 해서야 어떻게 본연의 무위대도(無爲大道)를 깨달을 수 있을 것이며, 일체를 받지 않는 임금의 자리에 오를 수 있겠습니까? 비록 금가루라 해도 눈에 들어가면, 눈이 멀 뿐인데 어떻게 큰 광명을 볼 수 있겠습니까. 가련한고 가련합니다. 훌륭한 젊은이들이 집을 떠나 도를 배우니 그 뜻은 비범하지만 결과는 한바탕 헛수고일 뿐이니 매우 슬프고 불쌍한 일입니다.
옛 사람이 이르기를, "차라리 천 년을 깨닫지 못하더라도 하루 공부를 잘못하면 안 된다"했습니다. 수행하여 도를 깨달음은 쉽고도 어려우며 어렵고도 쉬운 것입니다. 이것은 전등을 켜는 것과 같아서, 알면 손가락 한 번 퉁기는 사이에 크게 광명을 놓고 만년(萬年)의 어둠을 단박에 없애지만, 알지 못하면 기회는 사라지고 등불은 꺼져 번뇌만 더 늘어납니다. 더러 참선을 하면서 화두를 들던 사람이 마(魔)에 집착하여 발광하고, 피를 토하고 병이 나며, 무명의 불꽃이 켜져 '나와 남이라는 생각(人我相)'이 깊어지는 것은 현저한 예가 아니겠습니까. 그러므로 공부하는 사람은 몸과 마음을 잘 조화시켜서 마음을 평안하게 하고 기(氣)를 고르게 하기를 힘써서, 마음에 걸림도 없고, 나와 남이라는 소견도 없어, 항상(行住坐臥) 현모한 기틀에 오묘하게 계합(妙合玄機)할 수 있어야 합니다.
4. 공부의 어려움과 쉬움
1) 초심자의 어려움과 쉬움
참선이라는 이 한 법은 본래 분별(分別, 이치를 따져서 논하는 일)할 수 없지만, 다만 공부해 가는 데 있어서 초심자는 초심자대로 어려움과 쉬움이 있고, 구참자는 구참자대로 어려움과 쉬움이 있습니다. 그러면 초심자가 어려운 것은 무엇이겠습니까. 초심자는 몸과 마음이 순숙(純熟)하지 않아 들어갈 길을 찾긴 해도 분명하지가 않습니다. 공부를 해도 향상되지 않고, 마음이 조급하지 않으면 그저 눈만 껌벅거리며 세월을 보냅니다. 결국 '첫해에는 처음이라 참구해 보는 것이고, 그 다음 해에는 벌써 오래 참구한 사람처럼 되며, 3년이 되면 아예 참구하지 않은' 결과가 되고 맙니다. 초심자가 쉬운 점은 무엇입니까? 오직 하나의 신심(信心)과, 장영심(長永心)과 무심(無心)만 갖추면 된다는 것입니다. 소위 신심이란 것은 첫째, 나의 마음이 본래 부처이며 시방 세계의 모든 중생과 더불어 다르지 않음을 믿는 것이요, 둘째,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설하신 모든 법이 생사를 요달(了達)하여 부처를 이루는 도임을 믿는 것입니다. 이른바 장영심(長永心)이란, 어떤 한 법을 선정해서 생을 마칠 때까지 수행하되 내생(來生)과 후내생(後來生)에 이르도록 오로지 이와 같이 지켜가는 것입니다. 참선하는 사람은 늘 이와 같이 참구해야 하고, 염불하는 사람도 늘 이와 같이 염(念)해야 하며, 주문을 지송(指呪)하는 사람도 이와 같이 지송(持誦)해야 하고, 교학(敎學)하는 사람도 늘 이와 같이 듣고 생각하고 닦아야 합니다. 어떠한 법문을 수행하더라도 계(戒)가 근본이 됩니다. 과연 이와같이 수행해 나가기만 한다면 이루지 못할 일이 없을 것입니다.
위산( 山) 스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만약 누구든지 능히 이 법을 수행하되 3생을 물러서지 않는다면 반드시 부처의 자리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하셨고, 또 영가(永嘉) 스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만약 내가 허망한 말로 중생을 속인다면, 영원히 발설지옥에 떨어져 헤아릴 수 없는 겁을 보낼 것이다" 하셨습니다. 이른바 무심(無心)이란, 일체를 놓아버려 마치 죽은 사람 같아서, 종일토록 대중을 따라 움직이지만 다시는 조금의 분별이나 집착도 일으키지 아니 하여 한 사람의 무심도인(無心道人)이 되는 것입니다.
처음 발심한(初發心) 사람이 만약 이 세 가지 마음을 갖추고 참선하여 화두를 든다면, 바로 '염불하는 것은 누구인가?'하십시오. 그대 스스로 묵묵히 생각하다 몇 번 소리내어 아미타불을 부르고, 이 염불하는 것이 누구이며, 이 한 생각은 어디서 일어나는 것인지를 보십시오. 여러분은 알아야 합니다. 이 한 생각은 내 입에서 나온 것도 아니고 내 몸에서 일어난 것도 아니라는 것을. 만약 그것이 내 몸이나 입에서 일어난 것이라면, 내가 죽고 나서도 내 몸과 입이 여전히 존재하는데 왜 염불을 못합니까? 여러분은 알아야 합니다. 이 한 생각은 내 마음에서 일어난 것이니, 바로 그 마음에서 생각이 일어나는 곳을 포착하여 예리하게 살펴보되, 마치 고양이가 쥐를 잡으려고 할 때처럼 모든 정신을 여기에 집중하여 일체 딴 생각이 없어야 합니다. 다만 완급(緩急)을 적당하게 할 것이니, 너무 조급하게 해서 병이 나게 해서는 안 됩니다.
행주좌와 내내 이와 같이 하여 날이 가고 달이 가면 공부가 깊어집니다. 그러다가 외가 익어 꼭지가 떨어지듯, 시절인연이 도래하면 무엇에 부딪치거나 밀치는 순간에도 홀연히 대오(大悟)할 것입니다. 이 때에는 사람이 물을 마셔보고 그 차고 따뜻함을 스스로 아는 것과 같이 곧장 의심 없는 경지에 이르니, 마치 네거리에서 자기 아버지를 만난 듯이 큰 안락을 얻게 될 것입니다.
2) 구참자의 어려움과 쉬움
오래 참구한 이의 어렵고 쉬움이란 어떤 것입니까? 이른바 오래 참구한 사람은 선지식(善知識)을 가까이하였고, 공부한 지 여러 해가 되었으며, 한 차례 단련되었으므로 몸과 마음이 순숙(純熟)해져서 공부길이 분명하며, 마음먹은 대로 공부할 수 있으므로 고통을 느끼지 않습니다. 오래 참구한 사람의 어려움은, 자재(自在)하고 명백하므로 그 상태로 중간에서 머물러 있는 것입니다. 화성(化城)에서 멈추고 마니, 보배 있는 곳에 이르지 못하는 것입니다. 고요히 있을 때에는 공부를 잘 하다가도 움직이고 있을 때에는 잘 하지 못하며, 진실한 수용(受用, 닥쳐오는 경계를 받아들이는 것)을 하지 못합니다. 심지어 경계(境界)를 만나면 감정을 일으켜 취하거나 버리기 때문에 좋아하고 싫어함이 완연합니다. 거칠거나 미세한 망상(粗細妄想)이 여전히 굳게 자리잡고 있어서, 이제까지 해 온 공부가 마치 찬물이 바위를 만나 물거품을 일으키듯 하여 아무 작용도 일으키지 못합니다. 이런 식으로 오래 하다 보면 피로하고 게을러지며, 결국 아무런 결과도 얻지 못합니다. 오래 참구한 사람은 이러한 곤란을 알았으면 그 즉시 본참화두(本參話頭)를 들되, 정신을 바짝 차려서 백척간두(百尺竿頭)에서 다시 매진해 나아가야 합니다. 그리하여 곧장 높고 높은 봉우리에 서고, 깊고 깊은 바다 밑을 다니되(高高峯頂立 深深海底行) 손을 놓고 마음대로 할 수 있게 되면 부처님이나 조사와 서로 마주 볼 것이며, 곤란함 속에서도 안주하게 될 것이니, 이 또한 쉽지 않겠습니까.
화두란 바로 한마음(一心)입니다. 우리의 이 한 생각 마음(一念心)은 안팎이나 중간에 있지 않으면서, 또한 중간이나 안팎에도 있습니다. 그것은 허공과 같이 움직이지 않으면서 모든 곳에 두루합니다. 그러므로 화두를 위로 끌어올리지도 말고 밑으로 끌어내리지도 마십시오. 위로 끌어올리면 도거(掉擧)가 일어나고, 아래로 끌어내리면 혼침(昏沈)에 떨어져 본래의 심성(心性)을 어기므로 다 중도(中道)가 아닙니다.
여러분은 망상을 두려워하여 망상을 항복 받는 것이 가장 어렵다고 여깁니다. 제가 여러분에게 말하지만 망상을 두려워하지 말고 망상에 힘을 허비하지도 마십시오. 망상을 항복 받기 위해서는 그것이 망상인 줄 알아차리기만 하면 됩니다. 그것에 집착하지도 말고 그것을 쫓아가지도 말며, 그것을 버리려고도 하지 마십시오. 오직 망상이 계속 이어지지만 않게 하면 망상은 자연히 없어집니다. 이른바 "망상이 일어나면 곧 망상인 줄 알 것이니, 망상인 줄 알면 그것은 곧 없어진다"고 하는 것입니다.
만약 망상을 이용하여 공부할 수 있게 되면, 이 망상이 어디서부터 일어나는가를 살펴보십시오. 망상은 자성이 없어 당체(當體)가 공하므로 바로 되돌리면 '나'가 본래 없는 마음의 성품인 자성청정법신불(自性淸淨法身佛)이 곧 바로 눈앞에 나타납니다. 진실로 말하면, 진여(眞如)와 망상(妄想)이 일체(一體)이고 중생과 부처가 둘이 아니며, 생사(生死)와 열반(涅槃), 보리(菩提)와 번뇌(煩惱)가 모두 본래 마음(本心)이요, 본래 성품이니, 분별할 필요가 없으며, 좋아하거나 싫어하고, 취하거나 버릴 필요도 없습니다. 이 마음은 청정하여 본래 부처이니 한 법도 필요치 않습니다. 어디에 허다한 방편이 있겠습니까. 참구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