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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두 참선법

티나는이야기

by 대공거사 2023. 2. 24. 2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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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종문(宗門)의 한 법

종문(宗門)은 참선을 위주로 합니다. 참선이란 마음을 밝혀 성품을 보는 것입니다. 이것은 바로 자기의 본래면목을 참구하여 뚫는 것이니, 소위 '자성을 밝게 깨쳐, 본래성품을 환히 보는 것(明悟自心 澈見本性)'입니다. 부처님께서 꽃을 들어 보이심으로부터 달마 조사께서 중국에 오셔서 전래하신 이후에 지금에 이르기까지 이 공부에 착수하는 방법은 여러 차례 변천이 있었습니다.

당, 송 이전의 선사들은 일언반구(一言半句)에 바로 도를 깨달았으며, 스승과 제자간의 전수라는 것은 마음으로 마음을 인가하는 것(以心印心)에 불과하여 어떤 실법(實法)도 있지 않았습니다. 일상적으로 묻고 답하는 것도 그때그때 방편으로 속박을 풀어 주는 것으로서 병에 따라 약을 줄뿐이었습니다. 그러나 송대 이후 사람들의 근기가 하열(下劣)해져서 일러주어도 알아듣지 못하니, 예컨대 '일체를 놓아라'거나, '선도 악도 생각하지 말라'해도 도무지 놓지 못하며, 선을 생각하지 않으면 악을 생각하는 식이 되었습니다.

이러한 시대가 되자 조사 스님들이 부득이 독으로써 독을 공격하는 방법을 채택하여 학인들에게 '공안(公案)'을 '참구'하라고 하였습니다. 처음에는 '화두(話頭)'를 '보라'고 하는데, 심지어 하나의 죽은 화두(死話頭)를 붙들고 결판을 내되 긴급히 계속하여 한순간도 놓치지 않도록 합니다. 마치 늙은 쥐가 나무 궤짝을 뚫을 때와 같이 한 군데를 몰고 늘어지면 뚫어질 때까지 결단코 그만둘 수 없는 것입니다. 이는 한 생각(一念)으로써 만 생각(萬念)을 물리치는 것이니, 실로 부득이한 방법이라 하겠습니다. 마치 나쁜 독이 몸 안에 있어, 칼로 째서 치료하지 않으면 살기 어려운 것과 같습니다.

옛 사람들의 공안이 많으나, 후에 와서는 오로지 '화두를 보라'고만 가르쳤습니다. 예컨대 '이 송장을 끌고 다니는 것은 누구인가?'이거나 '부모에게서 태어나기 전에 어떤 것이 나의 본래 면목인가(父母未生前 如何是我本來面目)?' 하는 화두를 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근래에 와서 제방에서 많이 쓰는 화두는 '염불하는 것은 누구인가?'하는 것인데, 이 화두는 실은 어떤 식으로 표현해도 다 마찬가지이며 모두 너무나 평범하여 별로 특별할 것도 없습니다. 말하자면, 경을 읽는 것은 누구며, 주문을 외우는 것은 누구며, 부처님께 절을 하는 것은 누구며, 밥을 먹는 것은 누구며, 옷을 입는 것은 누구며, 길을 가는 것은 누구며, 잠자고 깨어나는 것은 누구냐 하는 것들인데, 모두 같은 내용의 화두입니다.

'누구인가(誰)?'라는 물음의 답은 바로 마음입니다. 말은 마음에서 일어나므로 마음은 말의 머리(話之頭)요, 생각도 마음에서 일어나므로 마음은 생각의 머리(念之頭)입니다. 만법이 모두 마음으로부터 생기므로 마음은 만법의 머리(萬法之頭)인 것입니다. 실로 화두는 바로 생각의 머리(念頭-생각 이전의 자리)이며, 생각 이전의 머리는 바로 마음입니다. 요컨대 '한 생각 일어나기 전(一念未生之前)'이 바로 화두인 것입니다.

2) 화두를 보는 법

따라서 우리가 도를 알려면 화두(한 생각 일어나기 전의 자리)를 보아야 하며, 이것이 곧 마음을 관찰하는 것(觀心)입니다. 부모에게서 태어나기 이전의 본래면목은 바로 마음입니다. 그러므로 부모에게서 태어나기 이전의 본래면목을 본다(看)는 것은 곧 마음을 관하는 것입니다. 성품은 곧 마음이며, '듣는 자기의 성품을 돌이켜 듣는다'고 하는 것은 관(觀)하는 자기 마음을 돌이켜 관하는 것입니다. '청정한 깨달음의 상(淸淨覺相)을 원만히 비추어 본다'고 할 때의 '청정한 깨달음의 상'이 바로 마음이며, '비추어 본다(照)' 함이 곧 관(觀)입니다.

마음이 곧 부처이며(心卽是佛), 부처를 염하는 것(염불)이 곧 부처를 관하는 것(觀佛)이고, 부처를 관하는 것이 마음을 관하는 것(觀心)입니다. 그래서 '화두를 보라'고 하는 것입니다. 어떤 이는 '염불하는 것은 누구인가(念佛是誰)?'하는 화두를 보라고 하는데 이것이 바로 부처를 염하는 자기 마음을 관한 것(觀心)이며, 곧 자기 마음의 청정한 깨달음의 체(自心淸淨覺體)를 관조하는 것입니다. 또한 가지 성품의 부처(自性佛)를 관조하는 것입니다.

마음이 곧 성품이고, 깨달음이며, 부처입니다. 이것은 형상이나 고정된 처소가 없으므로 끝내 붙잡을 수 없습니다. 청정하게 본래 있는 그대로 법계에 두루하며, 나오지도 들어가지도 않고, 가고 옴도 없으니, 이것이 곧 본래 그대로 이루어져 있는 청정법신불인 것입니다.

수행인이 육근(六根)을 모두 거두어 들여, 한 생각이 처음 일어나는 곳을 살피면서 이 하나의 화두를 비추어 보면, 생각을 떠난 청정한 자기의 마음에 도달하게 됩니다. 다시 면밀하고 담담하게 고요히 비추어 보면, 곧바로 오온(五蘊)이 모두 공(空)하고, 몸과 마음이 함께 고요하여 마침내 아무 일도 없게 됩니다. 이때부터는 주야육시(晝夜六時-24시간)로 행주좌와(行住坐臥)에 여여부동(如如不動)하여, 날이 갈수록 공부를 깊이 해 가면 마침내 견성성불(見性成佛)하여 고액을 다 건너가게 될 것입니다(苦厄度盡).

옛날 고봉(高峯) 조사께서 말씀하시기를,

"공부하는 사람은 화두 살피기를, 마치 기왓장을 만 길이나 되는 깊은 못에 던졌을 때 곧장 밑바닥으로 내려가는 것과 같이 하라. 이렇게 하여 만약 7일이 되도록 깨닫지 못하면 내 머리를 자르라"고 했습니다. 함께 참구(同參)하는 이들이여, 이것은 몸소 겪어 본 분이 하신 말씀으로 진실한 말씀이며, 사람들을 속이는 허망한 말이 아닙니다.

그러나 어째서 현대인들은 화두를 드는 사람은 많아도, 도를 깨치는 사람은 적습니까? 이것은 요즘 사람의 근기가 옛 사람에 미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공부하는 사람이 참선을 하면서 화두의 이로(理路 - 화두를 참구해 들어가는 길)를 분명하게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은 동서남북으로 분주하게 오가며 스승을 찾고 법을 묻기만 하다가, 늘그막에 이르면 한 개의 화두도 분명하게 이해하지 못합니다. 어떤 것이 화두인지, 어떻게 해야 화두를 든다고 할 수 있는지 알지 못하고, 한 한 평생 말(言句)과 이름과 형상(名相)에 집착하여 말꼬리(話尾)를 가지고 마음을 쓰면서, '부처를 참구하는 이는 누구인가?', '화두를 비추어 보라' 하면서 계속 하다 보니 화두와는 정반대로 어긋납니다.

이렇게 해서야 어떻게 본연의 무위대도(無爲大道)를 깨달을 수 있을 것이며, 일체를 받지 않는 임금의 자리에 오를 수 있겠습니까? 비록 금가루라 해도 눈에 들어가면, 눈이 멀 뿐인데 어떻게 큰 광명을 볼 수 있겠습니까. 가련한고 가련합니다. 훌륭한 젊은이들이 집을 떠나 도를 배우니 그 뜻은 비범하지만 결과는 한바탕 헛수고일 뿐이니 매우 슬프고 불쌍한 일입니다.

옛 사람이 이르기를, "차라리 천 년을 깨닫지 못하더라도 하루 공부를 잘못하면 안 된다"했습니다. 수행하여 도를 깨달음은 쉽고도 어려우며 어렵고도 쉬운 것입니다. 이것은 전등을 켜는 것과 같아서, 알면 손가락 한 번 퉁기는 사이에 크게 광명을 놓고 만년(萬年)의 어둠을 단박에 없애지만, 알지 못하면 기회는 사라지고 등불은 꺼져 번뇌만 더 늘어납니다.

더러 참선을 하면서 화두를 들던 사람이 마(魔)에 집착하여 발광하고, 피를 토하고 병이 나며, 무명의 불꽃이 켜져 '나와 남이라는 생각(人我相)'이 깊어지는 것은 현저한 예가 아니겠습니까. 그러므로 공부하는 사람은 몸과 마음을 잘 조화시켜서 마음을 평안하게 하고 기(氣)를 고르게 하기를 힘써서, 마음에 걸림도 없고, 나와 남이라는 소견도 없어, 항상(行住坐臥) 현모한 기틀에 오묘하게 계합(妙合玄機)할 수 있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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